후쿠시마에서 말하는 Vol.8 히로하타 유코

살아지더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둘은 살아 있습니다. 내 노력이나 내 힘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1개월 후, 조금 진정이 되고 내가 살 곳을 찾았을 때야 비로소 ‘우리가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3월11일의 참사를 돌아봤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작지만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참사 이전 저는 365일 24시간 늘 일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고 후 회사에 갈 수도 없었고 내일 내가 할 일도 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정말 중요한 것은 함께있는 제 아들과 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직장에 복귀하면 또다시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불보듯 뻔했습니다.

이에 저는 2013년 봄에 농사를 짓기로 결심 했습니다.
아침에 아들에게 건네는 말은 ‘밥 먹었나, 학교에 가라, 목욕 끝났으면 자라’ 이 말조차도 사라진지 2년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당시 가설 주택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설 주택 옆에 있는 농지를 빌렸습니다. 일단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농사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농사 경험이 없고 몰랐던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지레짐작 실패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식하면 용기가 있다고 할까요? 농지를 빌리고, 퇴직금을 전부 털어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일단 꽃 재배부터 시작했습니다.
왜 하필 꽃이었을까요? 채소를 키워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채소는 방사능때문에 무리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꽃은 어떨까 의견을 물었더니 “꽃! 그거 좋다” 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자 그럼 꽃을 키우면 되겠네’ 라는 단순하고 무모한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책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씨를 뿌리면 싹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추어가 하고 있는 일이 다 그렇듯 싹이 나서 좋아하다가도 다음 날은 시들시들한 꽃을 보게되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가설 주택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 꽃을 재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러 방문했습니다. 그 때 꽃들을 보던 이웃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서 “이건 글렀다”라고 말하니 거짓말같이 다음날 시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것 투성인채 꽃재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제가 하지도 않았는데 비닐 하우스 문들이 열려 있었습니다. 꽃이 시들것 같이 보여 물을 주러 아침 6시에 갔더니 꽃밭에 이미 누군가 물을 대어줬고 잡초가 생겼다고 생각해서 잡초를 뽑으러 가보면 잡초 뽑기도 끝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설 주택에 사시는 70대, 80대의 어르신들은 모두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제가 실패할 것을 저만 제외한 모두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사람이었던 제가 손을 내밀자 그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분들과 그곳에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약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분들은 굳이 도움을 주지 않으셨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모르는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는 꽃 재배를 시작하고 2년 반 후에 시장에 화분 70000개를 납품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웃분들이 출하 장소 등등 무엇이든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익은 86,000엔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로인해,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도와주실거라는 그런 믿음과 연대인 것입니다. 멀리 피난가신 분들이 지금도 찾아와 주십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수익이 86,300엔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부족했던 부분들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