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에서 말하는 Vol.8 히로하타 유코

오다카 플랫폼

꽃을 재배하면서 오다카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카시마 구역의 가설 주택에서 오다카까지는 약 25킬로나 30킬로 정도의 거리입니다.
오다카에 가서 무너져 내려가는 제 집을 볼때면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와 원전 폭발과 같은 재앙의 차이가 있을까요? 원전 폭발의 피해는 해일 피해와 같이 쓱 사라지는 것이 아닌 점점 무너져가는 자연의 풍경이나 우리들의 집을 목도하게 할 뿐입니다.
전 마음에 바늘 한 개가 꽂힌 채로 돌아갑니다. 다음에 갈 때, 또 한 대 더 찔리면서 돌아가곤 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이것이 원전 사고의 가장 큰 아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슘도 방사능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참상의 결과에 대한 아픔이 더욱 큽니다. 풀로 뒤덮인 농경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기분이 늘 반복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쓸쓸히 혼자 돌아오는 것이 매우 슬퍼졌습니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오다카로 거리로 향해도 거리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다카 플랫폼’은, 모두가 대단하다고 응원해주지만 그것은 실상 제 자신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응원받아서 의미있는 일이다 생각은 했지만 되돌아 보니 자신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분명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것처럼, 모두도 분명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없어진 작은 언덕에 등불을 밝혀 놓음으로써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수 있게 되는것이 아닐까. 내가 아는 사람 만나고 싶고 보고싶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모여 ‘오다카 플랫폼’이 시작됐습니다.
‘오다카 플랫폼’의 초창기에는 화장실과 수도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화장실과 수도는 해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화장실도 수도도 마을의 어딘가를 가면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고무될만한 일이었습니다. 오다카 플랫폼에 오신 손님은 역에 화장실이 있기에 역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도 걷고 있지 않는 비어있는 거리를 통과해서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본 동네 사람들은 오늘은 사람이 다닌다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화장실을 가는 것 뿐인데 말이죠. 오다카 거리의 사람이 사는 느낌은 이렇게 생겨났게 됐습니다. 무엇이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 작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 저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반신반의로 시작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오다카 플랫폼’이 햇수로 어느덧 4년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고추로 산업을 일으켜?!

2016년 7월, 모두가 점점 오다카에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자주 거론되는 말은, ‘돌아와서 좋지만’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재배한 옥수수는 전부 흰코사향고양이가 먹었다”,“돌아오게 된것은 좋지만, 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들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됐습니다. 누가 어디에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그 점이 가장 컸던것 같습니다.
농가의 사람들이 와서 자신이 재배한 물건을 출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망설였습니다. 그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와중, 고추 재배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은 없었습니다. ‘옥수수 재배는 망쳤다!’,’감자 재배는 망쳤다!’ 라는 말은 많았지만 고추 재배가 안 된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추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섰고 저는 고추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3년에 ‘밭친구 농장’을 조성했습니다. 2015년에 ‘오다카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2017년에 ‘오다카 공방’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만들었다고나 할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나 할까, ‘예’와 ‘예스’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라고 해서, ‘예’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라고 들었을 때, 주부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사나요?” 라고 물으면 만족할만한 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금 무엇을 하며 먹고 살고 있는지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좀 괴로운 일입니다.

오다카에 우리가 자신있게 직업을 얘기할 수 있고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는 일자리가 창출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고로 인해 인간 관계가 끊어진 오고갈데 없는 이들이 서로 연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점에 대해 조금씩 생각한 것들이 연결되었고 결국 해일로 인한 조수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것은 고추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을 출하해서 돈이 돌면 그것은 산업으로 연결될 것이다. 라는 생각의 결과가 바로 고추사업 입니다.
우스개소리로 사람들이 고추사업은 치사한 개발사업이라고들 합니다. 100엔에 모종을 팔고, 수확한 고추들을 100엔에 다시 매입해서 그것을 가공해 500엔에 제품을 팔기에 모두들 고추사업은 치사하다고 놀렸습니다.

3월11일 사건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에게는 공통된 화제 거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항상 대화의 시작에 처음 듣는 말은 “3.11은 어땠나요?” “그때부터 어떻게 하셨어요?” 그 얘기를 하자면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사실 그동안에는 공통된 화제가 3.11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동안 고추를 재배함으로써 ‘내가 재배한 고추, 네가 재배한 고추’라는 공통의 화제거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재건같은 것은 잘 모르겠지만 공동체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해에는 세명이 모여서 시작을 했습니다. 15그루 밖에 재배할 수 없었습니다. 2년째는 64세대의 사람들이 응모했습니다.
고추 재배를 원해 응모한 64세대들 중에는 관공서 정원이나 보건 위생 센터 정원이나 5층 베란다 등 시설에 속한 곳의 응모도 있었습니다. 연령대로 볼 때 다양한 연령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최고령는 87세인 분도 계셨습니다. 방사능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홈 센터의 흙은 전국이 동일하기 때문에 홈 센터에서 사 온 흙을 사용하면 된다고 시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