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 소마 오다카 2011년3월11일부터 8년
(그날, 그리고 앞으로…)
2019년 9월 7일
히로하타 유코(廣畑裕子)씨
(오다카 플랫폼 대표)
들어가며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평범한 주부인 저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뭐하시는 분이지?’ 라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저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러분들과 함께 되돌아보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3월11일, 그날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저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3.5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여느때와 다름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2011년 3월 11일
지진의 진동과 동시에 핸드폰의 알림이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긴급 지진 속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엄청난 흔들림이 왔고 저는 잠깐 지진이 잦아든 뒤에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걸음을 디디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두 피난한다고 외치는 가운데 저는 그 순간 오다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3.5킬로의 오쿠마 읍에서 오다카까지, 서두르면 20분이면 돌아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열일곱살 먹은 제 아들은 그 무렵 집에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오다카로 돌아갈 때 도로는 전부 심한 정체로 해변 도로가 꽉 막혀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국도를 타기로 했습니다. 조금 달렸더니 도로가 30cm 정도 균열이 생겨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산길을 타고 돌아갔습니다.
집 근처까지 와서 바다 쪽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해일일 일어날거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가운데 곧이어 우리 집이 있는 곳으로도 해일이 들이닥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어디있을까? 이미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도 해일이 덮쳤을텐데? 정신없는 가운데 주유소 직원은 ‘절대 가면 안된다’ 라고 말했으나 제 머리속에는 아들의 행방을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고지대를 지나 집 앞 200미터 지점에 왔을 때, 두번째 해일이 막 지나간 직후였습니다.
우리집 옆 동네에는 주택들이 많았습니다. 지방 도로는 침수되고 흘러온 잔해물로 덮혀있었지만, 그 곳외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정말 매정하고 잔인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아들 생각밖에 안났어요. 잔해를 헤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을 짚어가며 조심해서 돌아가야 했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걸어갔습니다. 제 집 앞은 말문이 막히는 상태였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집은 해발 7미터 높이에 위치해 있었고, 집을 덮쳤던 해일의 높이는 4미터였기 때문에 집은 무사했습니다.
주위는 처참한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주위를 돌볼 여력도 없었고 그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매정하게도 이제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구나 생각하며 일단 집까지는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아들은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현관문을 열며 들어오는 저를 보고 “엄마, 왔어?” 라고 저를 보고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습니다. 아들은 “곧 자전거 가게에 돌아가서 3,000엔 내야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자초지종 사정을 들어보니 아침에 자전거 바퀴가에 구멍이 나서 수리비를 내야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구멍난 자전거 바퀴로 인해 지각을 했고 선생님과 검도부 동아리 선배에게도 혼났다는 겁니다.
언제나 오후 1시쯤이 되서 빨래를 하고 동아리 활동을 끝났는데 그날은 선생님께서, 「고된 하루였으니, 돌아가도 좋아」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아들은 가게에 들러 자전거 수리를 맡기고 평소와는 달리 2시경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은 현관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단번에 해일을 피해 피난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에는 중증장애인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구청 사람들이 대피하라고 말하자 할아버지를 모시고 대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곧이어 휠체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휠체어를 준비해서 대피하려고 하니 또 약이 없다, 아직 쌀쌀하니 덮혀드릴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집을 왔다갔다 하다가 대피하려고 현관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눈앞에 해일이 닥쳐있었다고 했습니다.